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 죄의식에 관한 보고서

죄와 벌 - 나무위키

죄와벌 초판본 표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1866)』

 

자기 신념과 죄의식

1865년.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는 총살형을 앞두고 풀려난 이후에 『죄와 벌』을 썼다. 이 소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뒷골목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로, 가난한 수재 대학생인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신의 사상을 스스로 실현할 수 있는지를 두고 시험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죄와 벌』의 무대는 1860년대 제정 러시아로 이듬해인 1861년에 농노해방령이 시행된다. 이로써 많은 노동력이 도시로 유입되지만 아직 도시는 그것을 소화할 일은 많지 않은 상태여서 가난과 혼란이 도시 전반으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마르멜라도프 가족이 이 시기의 피해자를 대변하고 있다. 마르멜라도프의 딸 소냐는 가난한 가족을 위해 창부 생활을 하고, 마르멜라도프는 술집에서 자신의 가난을 한탄하다 마차에 짓밟혀 죽고 만다. 라스콜리니코프의 가족 또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의 누이 동생이 그런 가족을 위해 돈 많은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가난을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의 지식인 계급을 대변하는 이 무대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이런 불합리한 사회에 극렬하게 반대하고 반기를 드는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이동생 두냐가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하려는 결혼을 극구 반대하다 못해 두냐와 어머니에게 증오심까지 품는다. 이는 곧 자신이 비범한 존재라면 이토록 불합리한 세상을 뒤엎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이지 않을까.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평범한 인물임을 안다. 이는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시도한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이기 전에 이미 인식하고 있지만, 자신의 사상을 끝까지 검증해보겠다는 생각으로 결국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그로 인해 끝모를 죄의식에 빠진다. 『죄와 벌』은 죄의식에 관한 보고서다.

 

재미있는 점은 예심판사 포르피리가 라스콜리니코프의 사상이 담긴 논문을 발견한 뒤에 그를 범인으로 의심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의 방어적인 논리를 뛰어넘지 못하고, 라스콜리니코프의 친구 라주미힌 또한 논리로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이겨내지는 못하는데 반해, 창녀 생활을 하는 소냐만은 다르다는 부분일 것이다. 포르피리의 날카로운 심문에 극도로 긴장하고 죄의식과 불안에 사로잡히기는 하지만 끝내 죄를 자백하지는 않지만, 바로 그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는 소냐, 이 거룩하면서도 그리스도에게 확고한 믿음을 가진 소냐에게만은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는 라스콜리니코프다.

 

옷을 단단히 동여맨 사람의 옷을 벗기는 건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다라는 옛이야기처럼 이해와 공감, 인정으로 다가서는 소냐에게 라스콜리니코프는 감화된다. 극도로 불안정하고 소외되고 그 누구에게서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삶을 사는 소녀가 그리스도에게 헌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다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논리로 맞서고 잘못을 고백하라고 다그치기 보다 사랑을 다해 대하는데, 이런 그 사람만이 지닌 배경과 특질, 행동과 사랑 앞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극도로 불안에 떠는 그 마음을 오히려 열어보였던 것은 아닐까. 소설의 말미로 갈수록 라스콜리니코프는 신앙을 가지고 회개할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끝내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거나 반성하는 모습은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곧 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테고, 이야기의 힘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을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강렬한 개성은 인간의 여러 본성을 가감없이 들춰내고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이려 하는 데 있다.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들과 그것들이 엇갈리는 모습 속에서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을 계속하게 되는 이야기들. 오래 두고두고 보아야 할 문학이 아닐까 싶다.

 


 

줄거리

라스콜리니코프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나폴레옹처럼 법을 넘어서는 인간, 개혁을 이끌고 법을 제정하는 사람으로써 비범한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소시민인 평범한 인간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이 비범한 인간인지 아닌지를 시험하기 위해 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죽여서 그 돈으로 사회의 선한 곳에 쓰려는 생각을 갖는다. 그는 노파를 도끼로 내려찍어 죽이지만 불미스럽게도 그 장면을 노파의 누이 동생 리자베타가 보게 되고, 얼떨결에 리자베타까지 죽여버리고 만다. 이후 라스콜리니코프는 극심한 죄의식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열병으로 쓰러진다.

 

한편 예심판사 프로피리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신의 사상을 기록한 논문을 발견하고 이에 흥미를 갖는다. 포르피리는 직감적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범인으로 의심한다. 둘은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이는 라스콜리니코프로 하여금 더 큰 죄책감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주정뱅이 마르멜라도프가 마차에 치여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를 돕고, 수중에 있던 돈 전부를 마르멜라도포의 딸 소냐에게 준다. 이를 계기로 가난한 가족을 위해 창부 생활을 자처하는 소냐와 연을 맺게 된다.

 

날로 깊어지는 죄의식에 시달리던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여동생 두냐와 어머니, 그리고 그의 절친 라주미힌에게 이별을 고하고 그들의 곁을 떠난다. 그리곤 소냐를 만나 자신이 노파와 리자베타를 죽인 범인임을 실토한다. 라스콜리니코프에게는 완고한 신앙심을 가진 소냐가 위로와 구원의 대상이었다. 그의 고백으로 소냐는 충격을 받지만, 이내 그와 함께라면 어디든지 함께 하겠노라고 맹세한다.

 

그 과정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만난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신의 아내를 죽이고 하인을 학대하여 죽게 만들고, 14살 소녀를 능욕하는 인간이다. 둘은 극명한 대비를 이루지만 한편으론 묘한 동질성을 서로에게 느끼는데, 이는 스비드리가일로프 또한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자신의 사상을 스스로 뛰어넘을 수 있는지 시험하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순전히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과 정욕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허용된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에게 자신의 범죄 행각을 고백한 것을 알고 마찬가지로 두냐에게 고백했지만, 완강한 거부로 자신의 사랑 고백을 거절당하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큰 충격을 준다. 경찰에 자수를 하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에 형기를 살기 위해 떠난다.

 


 

짧은 인용

 

스비드리가일로프 “나는 실은 무엇에도 이렇다 할 흥미를 못 느끼는 인간이오. 정말이오.”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下』 김희숙 옮김, 14쪽, 을유문화사, 2012

 

‘유령은, 말하자면 다른 세계의 단편이고 부분이고 시작이다. 물론 건강한 사람에겐 그것이 보일리 없다. 건강한 사람은 지상적인 사람이고, 따라서 충실함과 질서를 위해 오직 이 세상의 삶만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병에 걸려서 유기체 속의 정상적인 지상적 질서가 약간이라도 파괴되면, 이내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병이 심할수록 다른 세계와의 접촉도 많아져서, 인간이 완전히 죽게 되면 곧바로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것이다.’
(…)
“우리는 언제나 영원이라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관념으로, 무언가 거창한 것, 어마어마하게 큰 것으로 떠올리고 있소. 하지만 어째서 꼭 거창한 것이어야 하는 거요? 그런 것 대신에 그곳엔 연기에 시커멓게 그을은 시골목욕탕 같은 작은 방이 하나 있고, 구석구석에 거미가 집을 치고 있다. 이것이 영원의 전부다 라고 문득 상상해보시오. 실은 이런 것이 이따금 눈에 아른거릴 때가 있소이다.”

24쪽

한병철『서사의 위기』사라진 제3의 장소들

한병철『서사의 위기』

 

경험으로 쌓인 지식과 공동체적 삶으로서 전승되고 계승되는 ‘이야기’는 사라지고,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셀링으로 작동하는 ‘정보’만 남은 시대. 마치 1989년에 <<제3의 장소>>에서 미국에서 영국의 펍과 같은 이웃들이 함께 모여서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사라지고, 자동차와 와해된 공동체로 자동차와 분리된 개인만 남은 시대적 현실을 안타까워 했던 레이 올덴버그의 말들과 닮아 있다. 숫자로 측정된 정보는 이야기가 아니고, 과도한 연결 또한 이야기가 아니며,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 또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결국은 이야기는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고, 공동체 속에서 하는 것이며, 시작과 끝이 있고, 기억되고 말해지는 언어 속에는 빈틈이 있으며,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가 현대 사회에서는 거의 사라지고 없다는 말을 저자는 덧붙인다.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 중독과 상실감에 대하여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삭제를 위한 중독.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를 읽는다. 저자 소개가 의미심장하다. ‘삶의 압박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땐 술로, 그런 자기 자신을 호되게 통제하고 싶을 땐 음식을 거부했다’ 그런 자신의 중독 이야기를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알콜중독)과 <<욕구들>> (섭식장애)에 담았다. 그녀는 내밀한 이야기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말한다. 글쟁이 특유의 리드미컬함으로.

냅은 말한다. “불안이 다가오면 당신은 생각한다. 내가 이래서 술을 마셨던 건데. 슬픔이 밀려오면 생각한다. 내가 이래서 술을 마셨던 건데. 분노나 자기 의심이나 자기 혐오가 일어나면 생각한다. 내가 이래서 술을 마셨던 건데. 중독은 누가 뭐래도 자기 보호 효과가 뛰어난 방법이다. 중독은 대처 기제이고, 강렬한 감정들에 대한 해독제다.”* 라고. 그 대목을 읽을 때 분명한 얼굴을 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어제를 포함해서 매번 “술이 도저히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담배는 칼같이 끊었던 사람이.

아버지는 현실을 견딜 수 없고 술은 얼마간 그를 견딜 수 있게 해주므로 둘은 단짝이다. 그도 그럴 만하다. 형들이 차례대로 세상을 떠나고, 어느 날에는 조카가 주검이 되어 돌아오고, 자식은 병에 못 이겨 너덜너덜에 손자를 안겨주는 것도 아니고, 파산과 회생을 넘나들며 가정을 일으켜보겠다고 했지만, 돌아보면 모든 게 아득해져만 가니 술 아니고는 그 적적한 밤들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이미 객사할 팔자였음을 알았는지 늘 엄마에게는 고마움을 표하지만, 도대체 폐허가 된 자기 삶을 맨눈으로 볼 수는 없다. 그는 매일 자기 기억을 술로 지워내고 있다.

그래, 사는 건 무정한 운명을 견디는 일이다. 때론 지옥불을 걷는 것 같다. 아무리 정직하고 열심히 살아도 결과는 같다. 결과만 같으면 좋은데 성공과 실패도 인간적 정의에 따라 정해지지 않는다. 술수가 없고, 출발선이 뒤라면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니 이국종 교수가 말한 것처럼 식당 밥을 먹으며 그것에 만족하고 미소짓지 않으면 좀처럼 살아나갈 수 없는 것이다.

엄마는 매번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술잔을 놓을 수 없다. 냅의 말처럼 “그러니 우리가 중독을 내려놓은 뒤에는 그동안 중독으로 마비시키고 변화시키려고 애썼던 감정들이 모조리 표면으로 부상하기 마련이다. 가끔은 급류처럼 덮쳐서 버거울 지경으로.”** 매일 자신을 괴롭히는데 도대체 어떻게 견디기 쉬울까.

그래도 별 수 없는 건 선택권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중독되어 자신을 파괴하며 살 것인가 (혹은 죽을 것인가) 그래도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는가…

하지만 마시지 말라는 말은 나도 이제 할 수가 없다. 나도 나를 구원할 수 없어서. 운명의 지랄맞음은 모두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음’에 있는 거니까. 다만 무기 없이 싸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해볼 뿐…

“만약 당신이 중독을 포기한다면, 좋은 소식은 하나의 전쟁이 끝났다는 것이다. 당신은 마약이나 술 의존증이라는 싸움에서, 혹은 거식증이나 폭식증이나 도박 같은 중독적 행동과의 싸움에서 공식적으로 막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나쁜 소식은 또 다른 전쟁이 막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제 새로운 영역에서 예전에 쓰던 무기도 없이 싸워야 한다. 마취제도 없이 매일매일 부상을 겪어내야 한다.”***


*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219쪽, 김명남 옮김, 바다, 2023
** p. 219
*** p. 214

리스펙토르 『G.H.에 따른 수난』 – 어떤 독백은 의식 하에 치러지는 기도다

독백의 이면. 그건 어떤 의식 속의 독백이다. 끝없이 말하지만 한치도 몸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는 독백, 고목처럼 선 채로 들끓기만 하다가 스스로 고목이 되어 버린 존재의 독백이다. 그녀가 내뱉는 보이지 않는 말은 보이지 않아서 더 선명하고, 밖으로 나아가지 못한 소리는 응축되어서 깊다. 소리는 끊어지지 않고 막히지도 않으며, 어디론가 새어나가지도 않아서 무한하다. 마치 내외부가 꽉 막힌 실내 공연장에서의 광란의 공연처럼 그녀는 말한다. 그러나 그곳은 그녀에게만 허용된 놀이터다. 누구도 초대되지 못한.

하나의 긴 독백이자 방언이며 기도이자 명상이기도 한 어떤 절규, 그것은 언제나 몸에 가로막혀서 바깥으로 뻗어나가지 못한 채 갇혀 있는 절규다. 싸우는 대상이 없어서 싸움이 끝나지 않는 고독한 전쟁 같은 독백은 끝없이 이어진다. 독백의 시작과 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죽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죽음은 미래이고 상상 가능한데, 나는 늘 뭔가를 상상하는 데 시간을 바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바로 현재인 이 순간은 상상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와 나 사이에는 빈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 순간은 바로 나의 내면이다.”1

왜 내면인가. 왜냐하면 그녀의 정체성은 사회에서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존재는 거부되었기 때문이고, 행동은 사멸되었기 때문이다. ‘소금’ 없이 거리를 배회하던 그녀는, 낙태하기로 하면서 이미 자신이 “나 역시 수천 개의 떨리는 섬모로 이루어진 하나의 중립적 원생동물에 지나지 않았”2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운명 앞에서 어떤 절대적인 무력감을 느끼는 자의 독백이다. 바퀴벌레 내장을 터트리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우고, 그것을 먹으며 벌레와 인간의 경계를 지우고, 신의 아름다움을 지우고, 사물이 스스로 즐기며, 현실과 생각의 경계를 지우는. 모든 것의 부정과 그것에서 탈피하는 자의 읊조림. 그러나 그녀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는다. 다만 고목처럼 서서 생각할 뿐이다. 그야 애초에 “진실은 내게 단 한 번도 의미가 없었”3으며, “나는 내게 일어난 사건을 창조해낼 것”4이라 했으니. 사실 내면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거나 모든 것을 말하기 마련이다.


 

1.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G.H.에 따른 수난> 106쪽, 배수아 옮김, 봄날의 책, 2020

2. 123쪽

3. 22쪽

4. 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