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The Godfather, 1972,1974) –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청년 시절의 비토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넘어와 터전을 꾸리던 청년 시절 비토 콜레오네와 친구들 앞에 돈 파누치가 나타난다. 파누치는 보호비 명목의 상납금을 요구하고, 그의 악명에 두려워하던 친구들 앞에서 걱정하지 말라는 듯 비토는 말한다. “그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거야.” 비토는 친구들에게 각각 협상에 필요한 돈(하지만 요구한 금액에 한참 못 미치는)을 받아들고, 파누치를 만난다. 비토는 말한다. 이제 시작하는 단계라 원하는 상납금을 당장은 줄 수 없다, 가진 것이 이것뿐이다, 다음 달부터는 원하는 만큼 상납할 테니 이번 달은 넘어가줄 수 없겠느냐고. 자신 앞에서 설설 기는 사람들만 만나왔던 파누치는 비토의 패기에 호쾌하게 웃으며 재미있는 놈이라는 듯 제안을 수락한다. 그러나 그것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은 아니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축제가 한창인 마을 어귀에서 파누치를 죽여버리는 순간에서야 제안의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돈’ 콜레오네

노년의 비토는 돈 콜레오네로 불리며 뉴욕에서 거대한 패밀리를 일군다. 그의 앞에 배우 자니 폰테인이 찾아와 울먹인다. 하고 싶었던 배역이 있으나 캐스팅이 안 된다며. 비토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의 목덜미를 붙잡고 호통을 친다. “사내답게 행동해!” 그리곤 변호사에게 일을 시키며 말한다. “그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것이다.”라고. 폰테인을 캐스팅할 수 없겠느냐고 점잖게 제안한다. 영화 제작자 월츠는 단칼에 거절한다. 조용히 물러서는 변호사. 그러나 이번에도 그것은 제안이 아니었다. 월츠의 애마가 머리가 잘려 피가 낭자한 채로 침대이불에 놓인 것에서 그 의미가 드러날 뿐.

혼자 남은 마이클

영화 <<대부>> 1, 2편에서 젊은 시절 비토(알 파치노)와 노년기의 비토(말론 브란도)의 에피소드는 짧지만 강렬하다. 가족과 신뢰, 의무, 충성으로 뭉친 패밀리를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 같아 보이기도 한다.

피로하기 그지없던 지난한 술자리 대화 이후에 문득 대부가 떠올랐다. 한참이나 전에 본 영화인데도 얼기설기 에피소드들이 생각나는 건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의 만남에서 상대는 제안을 가장한 요구를 몇 시간 동안 했었다. 허황된 꿈같은 말들. 돌아서서 다른 말하면 그만인 말들. 입장 차이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본인 입장에서만 말하는 단편적인 언어들. 사업하는 사람들이야 모두 매일 돈을 입에 담고 돈을 말하기 마련이지만, 그게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사람마저 돈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수준으로 나아가곤 한다. 그런 걸리적거림. 목덜미에 낀 생선가시 같은 이물감. 불편함. 아, 또 상대를, 나를 이용해먹으려고 하는구나 하는, 숱한 몸짓과 언행이 지겨웠다.

자신의 부모 형제를 모두 죽인 마피아가 있는 이탈리아를 떠나 뉴욕에 정착한 그가 훗날 거대한 패밀리를 이룰 수 있었던 데는 ‘돈’만을 쫓지 않고 ‘사람’의 믿음을 살 줄 아는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대화의 피로 때문이었겠지. 그 시뻘건 속이 훤히 들여다 보여서. 사실 믿음과 연대를 만든 비토는 돈과 의심만 낳은 마이클과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게 영화 <<대부>> 시리즈의 핵심이고 시대를 지나서도 통용되는 이야기인 이유다.

왠지 “그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거야”라고 하는 비토는 주변 사람에게 믿음을 준다. 그때 그의 말은 덜 중요하다. 오랜 세월 그가 주변 사람에게 신뢰를 쌓은 결과가 각각의 장면에서 드러나는 것일 뿐. 그러니 좋은 관계를 만들고 훌륭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사람 마음을 얻는 것’ 이외의 왕도는 없다. 돈도 결국 사람이 벌어다 주는 것이니까.

냉소적이지 않을 수 있는 힘

헤이~ 상상력이 많으면 그 인생 고달퍼~ 『타짜(2006)』

영화 『타짜』의 아귀는 동물적 본능대로 살아간다. 유대관계나 정과 믿음보다 생존과 이익의 나침반대로만 움직이는 존재. 그는 직선적이지만 날카롭다. 목표물만을 노리고 매섭게 달려드는 맹수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하이에나보다 더 무서운 건 응축된 힘 때문이다.

너무 많은 생각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을 망친다. ‘적당히’만큼 어렵고도 중요한 인생 지침서가 있을까. 알레르기 환자만큼 생각의 양극단을 오가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떨 때는 먼지 한 톨에도, 김치에 들어간 젓갈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때로는 아귀만큼 본능대로 움직인다. 그럴 때마다 쉽게 나빠지는 건 덤이다.

괴로울수록 적당히를 떠올린다. 너무 예민하지도, 너무 무감각하지도 않고, 너무 굳어 있거나 너무 물렁한 상태로 있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한 발 더 나아가 모가 나서 주변을 헤치지는 않지만 자기만의 개성이 뚜렷하기를 바라고, 둥글둥글하되 자기중심은 확고해서 흔들리지 않기를 원하게 된다. 양극단은 언제나 괴롭다.

그러나 가끔 고민 많은 이들과 대화할 때가 있다. 이상하게도 고민과 걱정이 많은 타입일수록 고집은 센데 귀는 닫혀 있고, 상상력은 지나치게 풍부한 만큼 행동하는 일은 없다. 패를 쥐었으면 고민만 하기보다 승부를 걸어야 함에도 늘 ‘이 패를 내는 게 좋을까’, ‘저 패를 내는 게 나을까’ 하고 생각만 하는 꼴이다.

그들은 잡다한 감상에 늘 젖어 있다. 회한이 가득한 과거를 끝없이 들춰내고, 오지 않은 미래를 늘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데 여념 없다. 그들이 떠올리는 과거란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자신이 과거에 대해 가지는 인식과 생각일 뿐이라는 걸 모른다. 그저 그 생각을 떠들 뿐이다. 떠들어서 잊으려 한다. 마치 술 마시고 잊으려 하는 이들처럼.

그리고 그들의 패는 늘 자기 손에만 쥐어져 있고 늘 감춰져 있다. 항상 지지 않는 선택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그들은 곧 알게 된다. 언제나 패배하는 선택을 해왔다는 사실을.

어차피 뻔하다. 이기거나 지는 것밖에 없다. 지는 마음으로 살면 영원히 패배자로 살게 되고, 회피하며 살아도 달라질 것은 없다. 가진 패가 있으면 질러야 한다. 뭘 가졌는지를 모르면 살펴보기부터 해야 한다. 이기든 지든 그 다음은 그 다음의 패를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왜 도박판에 끌려나와 있는지, 이곳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고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떠들고 있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도박판 이전의 삶을 들출 필요도, 이곳을 나가면 어떻게 하겠다는 포부도 무의미하다. 판에 앉은 이상 게임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자기 생각에 심취한 이들은 자기 생각만큼 애지중지하는 것도 없다. 고민을 오래 할수록 고민에 대한 생각도 바꿀 수 없는 거대한 신념이 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떠들 때 옆에 있으면 그들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만 하게 될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고민은 당장 행동을 바꿔야 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내 안에 머무르는 친구나 자식 같은 존재라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고민과 걱정을 없애려 들면 득달같이 달려와 말한다.

“그 정도 고민은 아니다!”

 

 

취향 없는 사람과 냉소적인 사람은 매력이 없다. 매사에 부정적인 면만 들춰내는 사람의 곁에는 늘 사람이 없다. 내면화한 패배주의와 냉소는 전염병과 같다. 사람은 예민한 감각의 동물이기에 그런 이들을 쉽게 알아차리고 거리를 둔다. 그럴수록 그들은 더 고립되고 더 냉소적이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상대도 원할 확률이 높다. 내가 매력을 느끼는 것에 상대도 매력을 느낀다. 사람은 비슷하다. 그렇다면 투덜거릴 때가 아니라 웃어보일 때다.

 

찰리 채플린 『황금광 시대(gold rush, 1925)』 연설은 못하지만 춤을 보여주겠다며 포크에 빵을 꽂아 춤을 보여주는 모습. 그의 표정과 눈빛이 한참이나 머릿속에 남아서 맴돌았다.

 

체력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요즘에 짬을 내어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하나 둘 보기 시작했다. 황금광시대(1925), 시티라이트(1931)나 모던 타임즈(1936), 위대한 독재자(1940). 양차 대전과 대공황, 나치 출현이 있던 시대 속에서도 누군가는 사랑과 희망, 웃음을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자기 생각에만 빠져 지내곤 한다. 그리고 그 둘은 완벽하게 다른 세상에서 산다. 어쩌면 평생 알콜중독 아버지와 병, 트라우마로 곪아가는 속을 어쩌지 못해서 자기연민에 빠진 글이 빼곡했던 나로서도 색다른 발견이었다. 더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시티라이트 1931. 자기 눈을 뜨게 해주었던 사람이 백만장자가 아니라 허름한 옷을 입고 우스꽝스러운 일을 당한 남자라는 것을 보았을 때, 채플린은 특유의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낸다. 다시 서울에 올라온 후로 더욱 그렇게 지낸다. 몰입해서 지내다 잠깐 빠져나올 때면 온몸이 보내오는 고통 신호를 더 생생하게 느낀다.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오직 내 고통과 즐거움만이 있다. 그 외의 다른 건 없다. 그것만큼 단편적인 세상살이도 없다.

그런데 채플린의 영화 속 인물들은 다르다. 바지 뒷구멍이 구멍 난 채로 돌아다녀도, 기계의 그늘 속에서 기계가 된 것처럼 지내도, 한 푼 돈을 벌기 위해 복싱 경기장에 올라도, 독재자를 따르는 군인들에게 늘 괴롭힘을 당하더라도 그는 그 속에서 웃음을 찾고 휴머니티를 잃지 않는다. (물론 그런 영화라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숱한 반복적인 행동과 우스꽝스러운 몸짓이 만든 코미디는 그의 전신이 담긴 풀샷에 적극적으로 드러나고, 클로즈업되어 감정과 표현이 보다 강하게 나타나는 씬에서는 묘한 파토스가 그대로 느껴진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하는 게 그 모습들을 두고 하는 말일까 싶은 것이 곳곳에 배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를 풍자하면서 바보같은 모습으로 일관하다가 처절하게 내뱉는 위대한 독재자의 마지막 연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위대한 독재자(1940) 영화 내내 블랙유머와 풍자로 웃음을 주는 그이지만, 마지막 연설에서만큼은 결의에 찬 연설을 이어나간다.

 

결국 냉소적이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적당히’ 할 수 있는 균형감각이 가장 중요한 듯하다. 밸런스를 잡으려면 최소한의 정신력이 필요하고, 정신력은 체력의 뒷받침이 필수적이므로 모든 것의 시초는 건강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런 면에서 근래의 무기력감을 조금이라도 털어내고 웃고 싶은 마음이 크다. 누군가를 탓하기 전에 나부터 다잡고 일어서자 싶은 나날이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 죄의식에 관한 보고서

죄와 벌 - 나무위키

죄와벌 초판본 표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1866)』

 

자기 신념과 죄의식

1865년.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는 총살형을 앞두고 풀려난 이후에 『죄와 벌』을 썼다. 이 소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뒷골목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로, 가난한 수재 대학생인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신의 사상을 스스로 실현할 수 있는지를 두고 시험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죄와 벌』의 무대는 1860년대 제정 러시아로 이듬해인 1861년에 농노해방령이 시행된다. 이로써 많은 노동력이 도시로 유입되지만 아직 도시는 그것을 소화할 일은 많지 않은 상태여서 가난과 혼란이 도시 전반으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마르멜라도프 가족이 이 시기의 피해자를 대변하고 있다. 마르멜라도프의 딸 소냐는 가난한 가족을 위해 창부 생활을 하고, 마르멜라도프는 술집에서 자신의 가난을 한탄하다 마차에 짓밟혀 죽고 만다. 라스콜리니코프의 가족 또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의 누이 동생이 그런 가족을 위해 돈 많은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가난을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의 지식인 계급을 대변하는 이 무대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이런 불합리한 사회에 극렬하게 반대하고 반기를 드는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이동생 두냐가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하려는 결혼을 극구 반대하다 못해 두냐와 어머니에게 증오심까지 품는다. 이는 곧 자신이 비범한 존재라면 이토록 불합리한 세상을 뒤엎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이지 않을까.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평범한 인물임을 안다. 이는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시도한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이기 전에 이미 인식하고 있지만, 자신의 사상을 끝까지 검증해보겠다는 생각으로 결국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그로 인해 끝모를 죄의식에 빠진다. 『죄와 벌』은 죄의식에 관한 보고서다.

 

재미있는 점은 예심판사 포르피리가 라스콜리니코프의 사상이 담긴 논문을 발견한 뒤에 그를 범인으로 의심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의 방어적인 논리를 뛰어넘지 못하고, 라스콜리니코프의 친구 라주미힌 또한 논리로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이겨내지는 못하는데 반해, 창녀 생활을 하는 소냐만은 다르다는 부분일 것이다. 포르피리의 날카로운 심문에 극도로 긴장하고 죄의식과 불안에 사로잡히기는 하지만 끝내 죄를 자백하지는 않지만, 바로 그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는 소냐, 이 거룩하면서도 그리스도에게 확고한 믿음을 가진 소냐에게만은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는 라스콜리니코프다.

 

옷을 단단히 동여맨 사람의 옷을 벗기는 건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다라는 옛이야기처럼 이해와 공감, 인정으로 다가서는 소냐에게 라스콜리니코프는 감화된다. 극도로 불안정하고 소외되고 그 누구에게서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삶을 사는 소녀가 그리스도에게 헌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다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논리로 맞서고 잘못을 고백하라고 다그치기 보다 사랑을 다해 대하는데, 이런 그 사람만이 지닌 배경과 특질, 행동과 사랑 앞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극도로 불안에 떠는 그 마음을 오히려 열어보였던 것은 아닐까. 소설의 말미로 갈수록 라스콜리니코프는 신앙을 가지고 회개할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끝내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거나 반성하는 모습은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곧 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테고, 이야기의 힘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을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강렬한 개성은 인간의 여러 본성을 가감없이 들춰내고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이려 하는 데 있다.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들과 그것들이 엇갈리는 모습 속에서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을 계속하게 되는 이야기들. 오래 두고두고 보아야 할 문학이 아닐까 싶다.

 


 

줄거리

라스콜리니코프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나폴레옹처럼 법을 넘어서는 인간, 개혁을 이끌고 법을 제정하는 사람으로써 비범한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소시민인 평범한 인간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이 비범한 인간인지 아닌지를 시험하기 위해 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죽여서 그 돈으로 사회의 선한 곳에 쓰려는 생각을 갖는다. 그는 노파를 도끼로 내려찍어 죽이지만 불미스럽게도 그 장면을 노파의 누이 동생 리자베타가 보게 되고, 얼떨결에 리자베타까지 죽여버리고 만다. 이후 라스콜리니코프는 극심한 죄의식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열병으로 쓰러진다.

 

한편 예심판사 프로피리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신의 사상을 기록한 논문을 발견하고 이에 흥미를 갖는다. 포르피리는 직감적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범인으로 의심한다. 둘은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이는 라스콜리니코프로 하여금 더 큰 죄책감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주정뱅이 마르멜라도프가 마차에 치여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를 돕고, 수중에 있던 돈 전부를 마르멜라도포의 딸 소냐에게 준다. 이를 계기로 가난한 가족을 위해 창부 생활을 자처하는 소냐와 연을 맺게 된다.

 

날로 깊어지는 죄의식에 시달리던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여동생 두냐와 어머니, 그리고 그의 절친 라주미힌에게 이별을 고하고 그들의 곁을 떠난다. 그리곤 소냐를 만나 자신이 노파와 리자베타를 죽인 범인임을 실토한다. 라스콜리니코프에게는 완고한 신앙심을 가진 소냐가 위로와 구원의 대상이었다. 그의 고백으로 소냐는 충격을 받지만, 이내 그와 함께라면 어디든지 함께 하겠노라고 맹세한다.

 

그 과정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스비드리가일로프를 만난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신의 아내를 죽이고 하인을 학대하여 죽게 만들고, 14살 소녀를 능욕하는 인간이다. 둘은 극명한 대비를 이루지만 한편으론 묘한 동질성을 서로에게 느끼는데, 이는 스비드리가일로프 또한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자신의 사상을 스스로 뛰어넘을 수 있는지 시험하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순전히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과 정욕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허용된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에게 자신의 범죄 행각을 고백한 것을 알고 마찬가지로 두냐에게 고백했지만, 완강한 거부로 자신의 사랑 고백을 거절당하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큰 충격을 준다. 경찰에 자수를 하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에 형기를 살기 위해 떠난다.

 


 

짧은 인용

 

스비드리가일로프 “나는 실은 무엇에도 이렇다 할 흥미를 못 느끼는 인간이오. 정말이오.”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下』 김희숙 옮김, 14쪽, 을유문화사, 2012

 

‘유령은, 말하자면 다른 세계의 단편이고 부분이고 시작이다. 물론 건강한 사람에겐 그것이 보일리 없다. 건강한 사람은 지상적인 사람이고, 따라서 충실함과 질서를 위해 오직 이 세상의 삶만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병에 걸려서 유기체 속의 정상적인 지상적 질서가 약간이라도 파괴되면, 이내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병이 심할수록 다른 세계와의 접촉도 많아져서, 인간이 완전히 죽게 되면 곧바로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것이다.’
(…)
“우리는 언제나 영원이라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관념으로, 무언가 거창한 것, 어마어마하게 큰 것으로 떠올리고 있소. 하지만 어째서 꼭 거창한 것이어야 하는 거요? 그런 것 대신에 그곳엔 연기에 시커멓게 그을은 시골목욕탕 같은 작은 방이 하나 있고, 구석구석에 거미가 집을 치고 있다. 이것이 영원의 전부다 라고 문득 상상해보시오. 실은 이런 것이 이따금 눈에 아른거릴 때가 있소이다.”

24쪽

영화 브루탈리스트(Brutalist, 2025) – 왜 건축인 거죠?

The Brutalist | movie | 2024 | Official Trailer

브루탈리스트(Brutalist, 브래디 코베, 2024)

여하튼 이 부다페스트 출신의 유대인 건축가가 아메리칸이 살아 숨쉬던 미국에 당도하여 펼쳐지는 고난과 성취와 실패와 고통의 이야기 속에는 삶의 곳곳에 배어 있는 눅진함이 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온 건축가 라슬로와 굶주려 골다공증이 와서 휠체어를 타며 밤마다 끙끙 앓는 그의 아내, 위선적인 자본가를 보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허상을 다룬 거라는 말에 일리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나는 그저 시종일관 우울한 표정의 한 명의 예술가이자 건축가인 라슬로의 인생을 곁에서 함께 걷듯 보았다. 때론 현실에 절망하고, 때론 자기의 예술관을 관철시키려 애쓰다가 언젠가는 자기 예술 작품인 건축물에 정신을 놔버린 듯 열중하는, 그러나 자기 작품에 집착할수록 조금도 행복과는 멀어져가는 그의 어두운 영혼을 보는 듯했다.

 

“삼촌은 이제 회당에도 안 가고 도일스타운의 공사 현장을 넋이 나간듯 쏘다녀. 공사는 이제 많이 진척됐는데 착공날보다 조금도 행복해 보이질 않아. 혹시 그는 자신만의 제단을 쌓고 있는 걸까?”

 

마지막에 조카가 했던 말. “당신이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목적지이지 과정이 아니라”는 말은 그 과정을 아는 관객 입장에서는 정말 이상하고 역설적인 말처럼 들린다. 1980년. 제1회 건축 비엔날레에서 백발의 노인이 된 라슬로는 자기 작품들을 소개하고, 그의 삶을 평하는 모습을 그 특유의 음울한 얼굴로 바라만 본다. 그의 삶에서 있었던 진실은 오직 본인 가슴에만 묻어두려는 듯.

 

하필 요즘처럼 개성 잃은 생존의 노예가 되었을 때 보아서인지 여운이 있었다. 수없이 죽어갔던 주변의 지인들은 도대체 기억되지 못하고 사라져만 갔다. 아무리 핍박받고,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나치가 휩쓸고 간 유럽에 여전히 남아 있는 아내를 그리워하고, 위선적인 자본가에 멸시를 당하면서도 자기만의 건축 세계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니 단 하나는 남았다.

 

그의 건축물. 그의 정신.

 

“왜 건축인 거죠?”

“세상 어느 것도 그 자체로는 설명이 안 돼요.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걸 만드는 거죠. 전쟁은 참혹했지만 그럼에도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제 프로젝트의 상당수가 살아남았어요. 아직도 그곳에 있다고요. 그 도시에. 유럽의 끔찍한 기억들이 더는 수치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날이 오면 그 기억들은 오히려 정치적인 자극제가 되어 민족의 역사 속에 늘 반복되는 또 다른 변혁의 불씨가 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분노와 두려움의 서사가 사람들 사이에 나돌 거고 그런 천박한 말들이 강물처럼 흘러넘칠 겁니다. 하지만 제 건물들은 다뉴브 강물의 침식조차 견딜 수 있게 설계됐어요.”

“아주 시적인 답변이군요.”

 

내게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싶었다.

 

‎The Brutalist (2024) directed by Brady Corbet • Reviews, film + cast • Letterboxd

영화 듀얼(Duel, 1971) – 공포는 이미지다

“이건 내 인생에 없어도 될 20분일 뿐이고 날 휘감고 있던 끈들은 이제 끊어질 거야.” – 데이비드 맨

 

공포는 이미지다. 공포는 상상이며 은유이고 하나의 상징이다. 공포는 구천을 떠도는 악귀처럼 구체적인 실체는 없으나 늘 인간을 위협하고 옥죄는 사형집행인으로 인간 곁에 서 있다. 공포가 위협적인 이유는 이유가 없거나 모르기 때문이며 언제 자신을 덮칠지 모르는 데다 정체마저 희미하고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마치 어두운 골목 어귀에 숨어서 그곳을 지나가는 행인의 목뒤를 노리는 살인마처럼 언제 어디서나 있을 것만 같은 불안을 야기하는 것이 공포이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위를 달리는 한 사내가 있다. 그는 성사될지가 불분명한 사업을 위해 먼 길을 횡단하는 중이다. 1차선 도로는 앞뒤로만 길게 뻗어져 있고 그 길의 어디쯤에는 가연성 물질을 싣고 달리는 트럭이 있다. 사내는 저녁에는 일을 마치기 위해 속력을 내서 트럭을 추월하고, 별일 아닌 것처럼 보였던 작은 사건(추월) 하나로 공포는 하나의 실체로 뒤바뀌어 사내를 엄습하기 시작한다.

트럭이 사내를 앞지른다. 사내는 답답함에 여러 차례 경적을 울리고 다시 트럭을 앞지른다. 몇 번의 추월이 있고 난 뒤부터 사내와 트럭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더는 무시할 수 없는 거추장스럽고 불쾌하고 찝찝한 적의가 꽃피는 순간이다. 이후로 트럭은 시종일관 사내를 뒤쫓거나 앞지르고 또 나아갈 길을 막아서는 등의 방해를 한다. 거대한 트럭이, 운전자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그 희미하지만 자신에게만은 진하게 다가온 공포의 이미지가 온몸을 휘감는다. 사내와 트럭의 대결은 이제 시작이다. 그러나 마지막 시점에 나타난 사내의 오묘한 표정에서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공포와 막 싸움을 끝낸 자의 허탈하면서도 음울하고 통쾌하면서도 허무한 표정을 본다. 도로에는 적막이 흐르고 그는 모든 것을 잃은 채 서 있다. 왜 대결해야 했는지, 혈투해서 얻은 결과는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벌어졌고 그것이 끝났을 뿐이다.

인간은 공포의 생산자다. 외부의 침입이나 외부와의 충돌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하나의 상징체로서 공포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공포는 일방통행할 수밖에 없는 도로에서, 이제는 되돌아갈 수도 없고 그것을 앞질러 나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멈추어 설 수도 없는 사면초가의 입장에서 스스로 상상한 공포와 마주하게 된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 바로 인간 자신이다. 악은 거대한 하나의 이미지로 작동하고 인간은 스스로 만든 악에 의해 스스로 단두대에 올라가서 자기 목을 내려치도록 한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사막 위를 달리는 거대한 트럭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그러나 스스로 지었다고 생각하지 못할) 죄로 인해 파생된 지워지지 않는 악인 것이다.

 

영화 듀얼(Duel, 1971). 스티븐 스필버그 장편 데뷔작.

★ : 4.5/5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Asteroid City, 2023) – 인생의 타이밍

인생의 타이밍은 기다려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기다린다고 해서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 스스로 걸어가 따먹거나 그것을 선택의 영역에서 완벽하게 배제시키는 것이 필요한 듯하다. 인생의 고됨이 말 몇마디로 해결될 문제였다면 말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전되어 인생의 대부분의 문제가 이미 매뉴얼처럼 혹은 몸의 유전자처럼 인이 박혀 세대를 넘나들며 떠돌아 다니고 있을 것이기에. 그러므로 모든 문제는 스스로 자를 박차고 나아가 해결하는 것, 그리고 타이밍은 그러한 시도 속에서 어느새 발견 되는 일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 (Asteroid City, 2023)

한병철『서사의 위기』사라진 제3의 장소들

한병철『서사의 위기』

 

경험으로 쌓인 지식과 공동체적 삶으로서 전승되고 계승되는 ‘이야기’는 사라지고,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셀링으로 작동하는 ‘정보’만 남은 시대. 마치 1989년에 <<제3의 장소>>에서 미국에서 영국의 펍과 같은 이웃들이 함께 모여서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사라지고, 자동차와 와해된 공동체로 자동차와 분리된 개인만 남은 시대적 현실을 안타까워 했던 레이 올덴버그의 말들과 닮아 있다. 숫자로 측정된 정보는 이야기가 아니고, 과도한 연결 또한 이야기가 아니며,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 또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결국은 이야기는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고, 공동체 속에서 하는 것이며, 시작과 끝이 있고, 기억되고 말해지는 언어 속에는 빈틈이 있으며,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가 현대 사회에서는 거의 사라지고 없다는 말을 저자는 덧붙인다.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 중독과 상실감에 대하여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삭제를 위한 중독.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를 읽는다. 저자 소개가 의미심장하다. ‘삶의 압박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땐 술로, 그런 자기 자신을 호되게 통제하고 싶을 땐 음식을 거부했다’ 그런 자신의 중독 이야기를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알콜중독)과 <<욕구들>> (섭식장애)에 담았다. 그녀는 내밀한 이야기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말한다. 글쟁이 특유의 리드미컬함으로.

냅은 말한다. “불안이 다가오면 당신은 생각한다. 내가 이래서 술을 마셨던 건데. 슬픔이 밀려오면 생각한다. 내가 이래서 술을 마셨던 건데. 분노나 자기 의심이나 자기 혐오가 일어나면 생각한다. 내가 이래서 술을 마셨던 건데. 중독은 누가 뭐래도 자기 보호 효과가 뛰어난 방법이다. 중독은 대처 기제이고, 강렬한 감정들에 대한 해독제다.”* 라고. 그 대목을 읽을 때 분명한 얼굴을 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어제를 포함해서 매번 “술이 도저히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담배는 칼같이 끊었던 사람이.

아버지는 현실을 견딜 수 없고 술은 얼마간 그를 견딜 수 있게 해주므로 둘은 단짝이다. 그도 그럴 만하다. 형들이 차례대로 세상을 떠나고, 어느 날에는 조카가 주검이 되어 돌아오고, 자식은 병에 못 이겨 너덜너덜에 손자를 안겨주는 것도 아니고, 파산과 회생을 넘나들며 가정을 일으켜보겠다고 했지만, 돌아보면 모든 게 아득해져만 가니 술 아니고는 그 적적한 밤들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이미 객사할 팔자였음을 알았는지 늘 엄마에게는 고마움을 표하지만, 도대체 폐허가 된 자기 삶을 맨눈으로 볼 수는 없다. 그는 매일 자기 기억을 술로 지워내고 있다.

그래, 사는 건 무정한 운명을 견디는 일이다. 때론 지옥불을 걷는 것 같다. 아무리 정직하고 열심히 살아도 결과는 같다. 결과만 같으면 좋은데 성공과 실패도 인간적 정의에 따라 정해지지 않는다. 술수가 없고, 출발선이 뒤라면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니 이국종 교수가 말한 것처럼 식당 밥을 먹으며 그것에 만족하고 미소짓지 않으면 좀처럼 살아나갈 수 없는 것이다.

엄마는 매번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술잔을 놓을 수 없다. 냅의 말처럼 “그러니 우리가 중독을 내려놓은 뒤에는 그동안 중독으로 마비시키고 변화시키려고 애썼던 감정들이 모조리 표면으로 부상하기 마련이다. 가끔은 급류처럼 덮쳐서 버거울 지경으로.”** 매일 자신을 괴롭히는데 도대체 어떻게 견디기 쉬울까.

그래도 별 수 없는 건 선택권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중독되어 자신을 파괴하며 살 것인가 (혹은 죽을 것인가) 그래도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는가…

하지만 마시지 말라는 말은 나도 이제 할 수가 없다. 나도 나를 구원할 수 없어서. 운명의 지랄맞음은 모두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음’에 있는 거니까. 다만 무기 없이 싸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해볼 뿐…

“만약 당신이 중독을 포기한다면, 좋은 소식은 하나의 전쟁이 끝났다는 것이다. 당신은 마약이나 술 의존증이라는 싸움에서, 혹은 거식증이나 폭식증이나 도박 같은 중독적 행동과의 싸움에서 공식적으로 막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나쁜 소식은 또 다른 전쟁이 막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제 새로운 영역에서 예전에 쓰던 무기도 없이 싸워야 한다. 마취제도 없이 매일매일 부상을 겪어내야 한다.”***


*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219쪽, 김명남 옮김, 바다, 2023
** p. 219
*** p. 214

영화 서브스턴스(Substance, 2024) – 자기 존재 가치를 기억하기

서브스턴스 (The Substance, 2024) – REMEMBER YOU ARE ONE

 

“점점 더 외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저는 괜찮은데요.”
“점점 더 힘들어지죠. 당신 자체로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기억하는 일 말이오. 당신 자신의 이런 측면도 여전히 가치 있고, 당신은 여전히 의미 있는 존재라는 걸 점점 망각해가죠. 그녀는 아직 시작 안 했소? 당신을 갉아먹지 않느냐는 말이오.”
– 영화 <서브스턴스 (The Substance, 2024)>

 

반쪽 짜리 세계에서 늘 세상의 반쪽만 보다 보니 자신도 반으로 쪼개져 버린 것이다. 둘로 갈라지는 건 쉬워도 하나로 다시 합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늘 좋고 싶으면 차라리 더 화끈하게 이기적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누구나 어렴풋이 안다. 엄연히 존재하는 자신과 세상의 그림자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미 세상 모든 곳은 소셜 미디어. 이런 글을 쓰는 이곳도, 새로 만든 홈페이지도, 인스타, 스레드도 모두 비뚤어진 거울로 비추는 반쪽 짜리 세계.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던가. 누구나 주목받고 싶어하지만 실은 돈만 벌고 숨고 싶은 것. 웃는 모습만 보이고 눈물은 뒤로 감추길 바라는 것. 대가리 꽃밭 같은 세상을 원하는 것. 그러나 어쩌랴. 당신의 밤은 알고 있지 않나. 끝내 외면해왔던 그늘이, 자기의 어두운 뒷모습이 언젠가 거대한 괴물이 되어 자신을 덮쳐올 거라는 걸.

쇼츠에 뇌를 절이고, 생각을 죽이고, 만남을 없애고, 정신보다 화폐에만 혈안이 되어서 살다보면, 그렇게 ‘열심히’만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아질 줄 알았겠지. 끌어오르는 본심이 아닌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읽힐 것인가에 골몰하는 사람은 매력이 없잖아. 마치 악보를 펼쳐놓고 음과 음 사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하나하나 계산을 해놓고 노래하는 사람에게 감동받을 일은 적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미디어에 대한 발작적인 거부감. 소셜 미디어가 활개치는 동안 더했던 것. 단 한순간도 미디어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인간과 인간의 교류는 희미해져가고, 반쪽 짜리 행복에 취해서 자신이 둘, 셋, 넷으로 쪼개져가는지도 모르고, 웃긴 영상을 보면 자기 삶이 진짜 웃고 있는 줄 알고 착각하는.

그러나 영화가 말한 것처럼 그건 빛 아래의 그림자를 바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겠지. 결국은 나는 나를 후벼파야 함과 동시에 그것에서 완벽하게 떨어져 나오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하나에 끝까지 매몰되지는 않는 것. 일을 마치면 머릿속에서 일을 완벽하게 끊어내듯이, 얼마간 슬픔 속에 머물더라도 다시 빛의 세계로 돌아오는 힘을 갖는 것, 주는 대로 먹는 게 아니라 스스로 먹을 거리를 정해보는 것. 제 아무리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해도, 운명에 구속되어 있다고 해도.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순한 자식인 알암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주검이 되어 돌아왔는데, 가해자는 이미 회개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그런데 아내와 친한 김 집사는 “하느님의 깊은 섭리를 인간인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거나 “주님께서 그를 용서하셨다면 우리도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라는 말만 되뇐다. 어떤 경우에서든 좋은 게 좋은 거고, 사랑과 행복과 용서, 수행, 감사, 회개 등만 외치는 사람이 있다. 마치 자기계발 중독자들이 “사람들은 이렇게 쉬운 걸, 알려줘도 하지 않는다. 하면 되는데 단지 안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처럼. 모두의 사정과 그들이 처한 환경이 천차만별로 다르다는 것은 애써 무시한 채.
그러나 남편. 글의 화자인 남편은 말이 없다. 마치 남처럼. 제3자처럼. 그러나 ‘좋음’과 ‘나쁨’, ‘행복’과 ‘절망’을 함께 볼 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겨우 그 아내의 절망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아이를 앓은 아비가 아니더라도 다만 저열하고 무명한 인간의 이름으로 그녀의 아픔만은 함께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이청준 <벌레 이야기> 1985)
사실 사랑은 그런 게 아닐까? 그러니까 나의 불온한 면에 대한 사랑도, 바보 같고 나쁜 면도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것. 그리고 그 모두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것.

리스펙토르 『G.H.에 따른 수난』 – 어떤 독백은 의식 하에 치러지는 기도다

독백의 이면. 그건 어떤 의식 속의 독백이다. 끝없이 말하지만 한치도 몸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는 독백, 고목처럼 선 채로 들끓기만 하다가 스스로 고목이 되어 버린 존재의 독백이다. 그녀가 내뱉는 보이지 않는 말은 보이지 않아서 더 선명하고, 밖으로 나아가지 못한 소리는 응축되어서 깊다. 소리는 끊어지지 않고 막히지도 않으며, 어디론가 새어나가지도 않아서 무한하다. 마치 내외부가 꽉 막힌 실내 공연장에서의 광란의 공연처럼 그녀는 말한다. 그러나 그곳은 그녀에게만 허용된 놀이터다. 누구도 초대되지 못한.

하나의 긴 독백이자 방언이며 기도이자 명상이기도 한 어떤 절규, 그것은 언제나 몸에 가로막혀서 바깥으로 뻗어나가지 못한 채 갇혀 있는 절규다. 싸우는 대상이 없어서 싸움이 끝나지 않는 고독한 전쟁 같은 독백은 끝없이 이어진다. 독백의 시작과 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죽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죽음은 미래이고 상상 가능한데, 나는 늘 뭔가를 상상하는 데 시간을 바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바로 현재인 이 순간은 상상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와 나 사이에는 빈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 순간은 바로 나의 내면이다.”1

왜 내면인가. 왜냐하면 그녀의 정체성은 사회에서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존재는 거부되었기 때문이고, 행동은 사멸되었기 때문이다. ‘소금’ 없이 거리를 배회하던 그녀는, 낙태하기로 하면서 이미 자신이 “나 역시 수천 개의 떨리는 섬모로 이루어진 하나의 중립적 원생동물에 지나지 않았”2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운명 앞에서 어떤 절대적인 무력감을 느끼는 자의 독백이다. 바퀴벌레 내장을 터트리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우고, 그것을 먹으며 벌레와 인간의 경계를 지우고, 신의 아름다움을 지우고, 사물이 스스로 즐기며, 현실과 생각의 경계를 지우는. 모든 것의 부정과 그것에서 탈피하는 자의 읊조림. 그러나 그녀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는다. 다만 고목처럼 서서 생각할 뿐이다. 그야 애초에 “진실은 내게 단 한 번도 의미가 없었”3으며, “나는 내게 일어난 사건을 창조해낼 것”4이라 했으니. 사실 내면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거나 모든 것을 말하기 마련이다.


 

1.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G.H.에 따른 수난> 106쪽, 배수아 옮김, 봄날의 책, 2020

2. 123쪽

3. 22쪽

4. 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