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서사의 위기』사라진 제3의 장소들

한병철『서사의 위기』

 

경험으로 쌓인 지식과 공동체적 삶으로서 전승되고 계승되는 ‘이야기’는 사라지고,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셀링으로 작동하는 ‘정보’만 남은 시대. 마치 1989년에 <<제3의 장소>>에서 미국에서 영국의 펍과 같은 이웃들이 함께 모여서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사라지고, 자동차와 와해된 공동체로 자동차와 분리된 개인만 남은 시대적 현실을 안타까워 했던 레이 올덴버그의 말들과 닮아 있다. 숫자로 측정된 정보는 이야기가 아니고, 과도한 연결 또한 이야기가 아니며,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 또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결국은 이야기는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고, 공동체 속에서 하는 것이며, 시작과 끝이 있고, 기억되고 말해지는 언어 속에는 빈틈이 있으며,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가 현대 사회에서는 거의 사라지고 없다는 말을 저자는 덧붙인다.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 중독과 상실감에 대하여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삭제를 위한 중독.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를 읽는다. 저자 소개가 의미심장하다. ‘삶의 압박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땐 술로, 그런 자기 자신을 호되게 통제하고 싶을 땐 음식을 거부했다’ 그런 자신의 중독 이야기를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알콜중독)과 <<욕구들>> (섭식장애)에 담았다. 그녀는 내밀한 이야기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말한다. 글쟁이 특유의 리드미컬함으로.

냅은 말한다. “불안이 다가오면 당신은 생각한다. 내가 이래서 술을 마셨던 건데. 슬픔이 밀려오면 생각한다. 내가 이래서 술을 마셨던 건데. 분노나 자기 의심이나 자기 혐오가 일어나면 생각한다. 내가 이래서 술을 마셨던 건데. 중독은 누가 뭐래도 자기 보호 효과가 뛰어난 방법이다. 중독은 대처 기제이고, 강렬한 감정들에 대한 해독제다.”* 라고. 그 대목을 읽을 때 분명한 얼굴을 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어제를 포함해서 매번 “술이 도저히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담배는 칼같이 끊었던 사람이.

아버지는 현실을 견딜 수 없고 술은 얼마간 그를 견딜 수 있게 해주므로 둘은 단짝이다. 그도 그럴 만하다. 형들이 차례대로 세상을 떠나고, 어느 날에는 조카가 주검이 되어 돌아오고, 자식은 병에 못 이겨 너덜너덜에 손자를 안겨주는 것도 아니고, 파산과 회생을 넘나들며 가정을 일으켜보겠다고 했지만, 돌아보면 모든 게 아득해져만 가니 술 아니고는 그 적적한 밤들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이미 객사할 팔자였음을 알았는지 늘 엄마에게는 고마움을 표하지만, 도대체 폐허가 된 자기 삶을 맨눈으로 볼 수는 없다. 그는 매일 자기 기억을 술로 지워내고 있다.

그래, 사는 건 무정한 운명을 견디는 일이다. 때론 지옥불을 걷는 것 같다. 아무리 정직하고 열심히 살아도 결과는 같다. 결과만 같으면 좋은데 성공과 실패도 인간적 정의에 따라 정해지지 않는다. 술수가 없고, 출발선이 뒤라면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니 이국종 교수가 말한 것처럼 식당 밥을 먹으며 그것에 만족하고 미소짓지 않으면 좀처럼 살아나갈 수 없는 것이다.

엄마는 매번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술잔을 놓을 수 없다. 냅의 말처럼 “그러니 우리가 중독을 내려놓은 뒤에는 그동안 중독으로 마비시키고 변화시키려고 애썼던 감정들이 모조리 표면으로 부상하기 마련이다. 가끔은 급류처럼 덮쳐서 버거울 지경으로.”** 매일 자신을 괴롭히는데 도대체 어떻게 견디기 쉬울까.

그래도 별 수 없는 건 선택권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중독되어 자신을 파괴하며 살 것인가 (혹은 죽을 것인가) 그래도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는가…

하지만 마시지 말라는 말은 나도 이제 할 수가 없다. 나도 나를 구원할 수 없어서. 운명의 지랄맞음은 모두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음’에 있는 거니까. 다만 무기 없이 싸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해볼 뿐…

“만약 당신이 중독을 포기한다면, 좋은 소식은 하나의 전쟁이 끝났다는 것이다. 당신은 마약이나 술 의존증이라는 싸움에서, 혹은 거식증이나 폭식증이나 도박 같은 중독적 행동과의 싸움에서 공식적으로 막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나쁜 소식은 또 다른 전쟁이 막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제 새로운 영역에서 예전에 쓰던 무기도 없이 싸워야 한다. 마취제도 없이 매일매일 부상을 겪어내야 한다.”***


*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219쪽, 김명남 옮김, 바다, 2023
** p. 219
*** p. 214

영화 서브스턴스(Substance, 2024) – 자기 존재 가치를 기억하기

서브스턴스 (The Substance, 2024) – REMEMBER YOU ARE ONE

 

“점점 더 외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저는 괜찮은데요.”
“점점 더 힘들어지죠. 당신 자체로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기억하는 일 말이오. 당신 자신의 이런 측면도 여전히 가치 있고, 당신은 여전히 의미 있는 존재라는 걸 점점 망각해가죠. 그녀는 아직 시작 안 했소? 당신을 갉아먹지 않느냐는 말이오.”
– 영화 <서브스턴스 (The Substance, 2024)>

 

반쪽 짜리 세계에서 늘 세상의 반쪽만 보다 보니 자신도 반으로 쪼개져 버린 것이다. 둘로 갈라지는 건 쉬워도 하나로 다시 합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늘 좋고 싶으면 차라리 더 화끈하게 이기적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누구나 어렴풋이 안다. 엄연히 존재하는 자신과 세상의 그림자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미 세상 모든 곳은 소셜 미디어. 이런 글을 쓰는 이곳도, 새로 만든 홈페이지도, 인스타, 스레드도 모두 비뚤어진 거울로 비추는 반쪽 짜리 세계.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던가. 누구나 주목받고 싶어하지만 실은 돈만 벌고 숨고 싶은 것. 웃는 모습만 보이고 눈물은 뒤로 감추길 바라는 것. 대가리 꽃밭 같은 세상을 원하는 것. 그러나 어쩌랴. 당신의 밤은 알고 있지 않나. 끝내 외면해왔던 그늘이, 자기의 어두운 뒷모습이 언젠가 거대한 괴물이 되어 자신을 덮쳐올 거라는 걸.

쇼츠에 뇌를 절이고, 생각을 죽이고, 만남을 없애고, 정신보다 화폐에만 혈안이 되어서 살다보면, 그렇게 ‘열심히’만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아질 줄 알았겠지. 끌어오르는 본심이 아닌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읽힐 것인가에 골몰하는 사람은 매력이 없잖아. 마치 악보를 펼쳐놓고 음과 음 사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하나하나 계산을 해놓고 노래하는 사람에게 감동받을 일은 적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미디어에 대한 발작적인 거부감. 소셜 미디어가 활개치는 동안 더했던 것. 단 한순간도 미디어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인간과 인간의 교류는 희미해져가고, 반쪽 짜리 행복에 취해서 자신이 둘, 셋, 넷으로 쪼개져가는지도 모르고, 웃긴 영상을 보면 자기 삶이 진짜 웃고 있는 줄 알고 착각하는.

그러나 영화가 말한 것처럼 그건 빛 아래의 그림자를 바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겠지. 결국은 나는 나를 후벼파야 함과 동시에 그것에서 완벽하게 떨어져 나오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하나에 끝까지 매몰되지는 않는 것. 일을 마치면 머릿속에서 일을 완벽하게 끊어내듯이, 얼마간 슬픔 속에 머물더라도 다시 빛의 세계로 돌아오는 힘을 갖는 것, 주는 대로 먹는 게 아니라 스스로 먹을 거리를 정해보는 것. 제 아무리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해도, 운명에 구속되어 있다고 해도.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순한 자식인 알암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주검이 되어 돌아왔는데, 가해자는 이미 회개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그런데 아내와 친한 김 집사는 “하느님의 깊은 섭리를 인간인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거나 “주님께서 그를 용서하셨다면 우리도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라는 말만 되뇐다. 어떤 경우에서든 좋은 게 좋은 거고, 사랑과 행복과 용서, 수행, 감사, 회개 등만 외치는 사람이 있다. 마치 자기계발 중독자들이 “사람들은 이렇게 쉬운 걸, 알려줘도 하지 않는다. 하면 되는데 단지 안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처럼. 모두의 사정과 그들이 처한 환경이 천차만별로 다르다는 것은 애써 무시한 채.
그러나 남편. 글의 화자인 남편은 말이 없다. 마치 남처럼. 제3자처럼. 그러나 ‘좋음’과 ‘나쁨’, ‘행복’과 ‘절망’을 함께 볼 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겨우 그 아내의 절망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아이를 앓은 아비가 아니더라도 다만 저열하고 무명한 인간의 이름으로 그녀의 아픔만은 함께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이청준 <벌레 이야기> 1985)
사실 사랑은 그런 게 아닐까? 그러니까 나의 불온한 면에 대한 사랑도, 바보 같고 나쁜 면도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것. 그리고 그 모두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것.

리스펙토르 『G.H.에 따른 수난』 – 어떤 독백은 의식 하에 치러지는 기도다

독백의 이면. 그건 어떤 의식 속의 독백이다. 끝없이 말하지만 한치도 몸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는 독백, 고목처럼 선 채로 들끓기만 하다가 스스로 고목이 되어 버린 존재의 독백이다. 그녀가 내뱉는 보이지 않는 말은 보이지 않아서 더 선명하고, 밖으로 나아가지 못한 소리는 응축되어서 깊다. 소리는 끊어지지 않고 막히지도 않으며, 어디론가 새어나가지도 않아서 무한하다. 마치 내외부가 꽉 막힌 실내 공연장에서의 광란의 공연처럼 그녀는 말한다. 그러나 그곳은 그녀에게만 허용된 놀이터다. 누구도 초대되지 못한.

하나의 긴 독백이자 방언이며 기도이자 명상이기도 한 어떤 절규, 그것은 언제나 몸에 가로막혀서 바깥으로 뻗어나가지 못한 채 갇혀 있는 절규다. 싸우는 대상이 없어서 싸움이 끝나지 않는 고독한 전쟁 같은 독백은 끝없이 이어진다. 독백의 시작과 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죽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죽음은 미래이고 상상 가능한데, 나는 늘 뭔가를 상상하는 데 시간을 바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바로 현재인 이 순간은 상상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와 나 사이에는 빈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 순간은 바로 나의 내면이다.”1

왜 내면인가. 왜냐하면 그녀의 정체성은 사회에서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존재는 거부되었기 때문이고, 행동은 사멸되었기 때문이다. ‘소금’ 없이 거리를 배회하던 그녀는, 낙태하기로 하면서 이미 자신이 “나 역시 수천 개의 떨리는 섬모로 이루어진 하나의 중립적 원생동물에 지나지 않았”2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운명 앞에서 어떤 절대적인 무력감을 느끼는 자의 독백이다. 바퀴벌레 내장을 터트리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우고, 그것을 먹으며 벌레와 인간의 경계를 지우고, 신의 아름다움을 지우고, 사물이 스스로 즐기며, 현실과 생각의 경계를 지우는. 모든 것의 부정과 그것에서 탈피하는 자의 읊조림. 그러나 그녀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는다. 다만 고목처럼 서서 생각할 뿐이다. 그야 애초에 “진실은 내게 단 한 번도 의미가 없었”3으며, “나는 내게 일어난 사건을 창조해낼 것”4이라 했으니. 사실 내면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거나 모든 것을 말하기 마련이다.


 

1.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G.H.에 따른 수난> 106쪽, 배수아 옮김, 봄날의 책, 2020

2. 123쪽

3. 22쪽

4. 25쪽

안전 의식

공사현장

 

산비틀에서 공사하는 인부들. 최소 2미터는 되어 보이는 철제 구조물(발 넓이도 안 되는)에 나무와 구조물을 붙잡고 올라선 인부들에게 작업반장은 말한다. “거기 잡고 올라가! 올라가다가 손가락 좀 찍힌다고 죽나 어디. 그냥 올라가라고” 그 말을 미처 못 듣고 있던 인부들이 몇 번의 보챔 끝에 듣고는 말을 받아친다. “뭐?” “뭐라하노 씨바..” 작업반장은 다시 자기 할 말만 한다. 이미 멀리 떨어진 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다. “봐봐. 밀리잖아.” 그런 그들을 뒤로 하고 나는 갈 길을 간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

한 여자가 급히 계단을 내려간다.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인파를 손으로 밀쳐내며 미끄러지듯 막 도착한 지하철 앞에 선다. 그녀는 열차 안의 한 아주머니에게 외친다. 이거 불광가는 것 맞아요? 휘둥구레진 눈망울들이 그녀를 쳐다본다. 아니오, 라는 말이 이것 불광가는 것 맞냐고, 라는 말에 파묻힌다. 아주머니는 맞은편 걸 타세요라 외치지만 허공에 퍼진 말은 안개처럼 곧 바닥에 가라앉는다. 어디를? 이거는 아니고? 그녀는 여전히 횡설수설하며 두리번거린다.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굴리며 선 그녀의 뒤엔 그녀에게 밀쳐진 노인이 쓰러질듯한 자세로 난간을 붙잡고 서 있다. 노인이 황망한 눈빛으로 여자를 쳐다본다. 그 사이, 지하철의 문은 닫히고,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노인은 안경을 고쳐 쓴 채 계단을 오른다.

쓰레기통을 뒤지던 노인

뚝섬역 인근 한강공원에서 한 노파가 뒤뚱거리며 공용 쓰레기통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녹색 쓰레기통에 고개를 깊숙이 처박고는 한참 쓰레기통을 뒤졌다. 노파는 봉지 하나를 뜯어서 쓰레기통 앞에 흩뿌렸다. 비둘기가 한두 마리씩 노파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비둘기는 머리를 바닥에 박아대며 먹이를 먹었다. 얼마나 굶주린 듯. 방금 무언가를 먹었다는 사실조차 금세 잊은 채 다시 부리를 쪼아대는 새들. 선봉대가 무사히 음식들을 먹는 광경을 본 나머지 비둘기들이 노파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노파를 따랐고, 노파는 봉지를 휘어잡고 튿고 거리에 또다시 뿌려댔다. 바닥은 음식물 찌꺼기로 뒤덮였고, 비둘기들의 찍찍거리는 소리와 비릿한 냄새가 거리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먼발치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던 중년의 부부가 그 상황을 보며 인상을 찌푸려댔으나 주변을 오가던 대부분의 사람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그녀를 지나쳤다. 나 또한 잠깐의 관찰을 뒤로하고 금세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하늘은 흐렸다.

감춰진 진심

요양병원에 새 환자 한 명이 입원했다. 중증이지만 죽음과는 거리가 먼 만성질환자였다. 환자는 스스로 거동하지 못했고 일상생활을 해나가지 못했다. 보호자는 24시간 자신이 돌볼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요양병원에 입원시켰다. 보호자는 매일 병원을 드나들었다. 양손에 먹을거리를 잔뜩 들고, 늘 밝은 인사를 건네며 병실에 들어선 그녀는 환자를 위해서라면 늘 지극정성이었다.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직원의 도움 없이 손수 자세를 바꿔주고, 몸 이곳저곳을 닦아주곤 했다. 엄연히 간병인과 요양보호사가 있는데도 그는 자기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한참 환자와 씨름한 뒤에는 양손에 가득 들고 온 과일과 떠먹는 요구르트를 먹였다. 보호자는 병원에 올 때마다 오랜 시간 환자 옆을 지켰다. 그 모습을 본 병원 직원들은 ‘정말 사랑하나보다’라며 애틋하고 따뜻한 사랑에 탐복했다. 요즘 저런 사람 몇 없는데 애정과 사랑이 넘친다고, 부럽다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요양병원에는 주에 1회 전체 시트와 환자복 등을 빨래하는 날이 있는데 그날이 바로 빨래하는 날이었다. 병원 내부를 대청소하는 날과 겹쳐서 모든 환자복과 침대 시트, 베갯잇 등을 벗겨내고 갈아입혔고, 거둔 옷들은 삶기 위해 바구니에 하나씩 담았다. 직원이 새 환자의 이불과 베갯잇을 수거해 가다가 베갯잇 속에 있던 이물질 하나를 발견했다. 곱게 접힌 그것을 꺼내어 살펴보니 부적이었다. 의아한 마음에 정성스레 여러 갈래로 접힌 부적을 펼쳐 보았다. 부적 한편에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 사람, 제발 빨리 죽여주세요.”

고독한 방랑자들

 

늦은 밤, 집에 가는 길이었다. 집 앞에 있는 작은 놀이터에서 한 노부부가 대화하는 중이었다. 그 옆을 무심코 지나가는데 머지않은 곳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이 보였다. 후줄근한 점퍼를 입은 채 구부정한 자세로 벤치에 앉아 있던 그는 노부부를 보며 연신 히죽거렸다. 괴이한 모습에 그를 보며 걷다가 그만 노인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황급히 웃음을 거두어 삼킨 그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홱 하니 돌려 버렸다. 그리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자신의 외로움을 칠흑 속에 감춰버리려는 듯.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그러나 나는 그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보았다. 낮밤 가리지 않고 놀이터 구석에 앉아 그 앞을 오가는 사람들을 훔쳐보던 사람임을. 그를 포함해 여럿 있었다. 시간을 죽이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 된 노인들. 혼자 밥 먹고 혼자 자면서 매일 한 걸음씩 죽음으로 걸어가는 고독자들. 갈 데 없고 반기는 이 없으나 자신의 고독을 감추려 부단히 애쓰는 부랑자들. 현실에 치이고 사람에 차여 혼자 스러져가는 시대의 재건자들. 그들은 사람들 속에 있었으나 혼자였다. 고독한 방랑자였다.

왜 거리일기인가

이태원 압사 사고가 있었던 거리

 

나는 삶을 ‘학교’가 아닌 ‘거리’에서 배웠다. 거리의 논리로 어른의 생활을 하나씩 깨쳐나갔고, 수많은 욕망의 전쟁터 속에서 생의 고단함과 추접스러움, 악어의 눈물과 손익 계산에 따라 계산된 기망, 두려움과 욕망을 쫓으며 사는 현실의 논리를 조금씩 알아갔다. 나는 빈자의 터전에서 태어났으므로 가는 곳마다 걸인과 구걸꾼, 노숙자와 병자, 실패자와 도망자가 즐비했고, 그들 사이에서 ‘왜 살아야 하는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스스로 묻고 체득하며 커왔다. 그것은 지난한 일이었지만, 나에게 남다른 깊이를 선물한 생명과 죽음의 원천이었으며, 세상을 더 깊이 관찰하고 나만의 시각을 가지게 한 천국과 지옥이 뒤섞인 지독한 현실 그 자체였다.

거리의 삶은 모두 실전의 영역에 있다. 아무리 고상한 인간이라 해도 먹고 싸고 자는 과정을 겪지 않을 수 없고, 하루 세 끼 밥을 먹고 밥벌이를 하고 잠을 자는 건 동물과 다를 바 없으며, 가지고 싶다고 하여 옷을 수백 벌을 동시에 껴입을 수 없고, 수백 그릇의 음식을 동시에 먹을 수도 없다. 인간으로서의 삶은 늘 현실과 떼레야 뗄 수 없는 긴밀한 연결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거리에서 수많은 방랑꾼을 보았다. 그들의 눈은 야생에 길들여진 동물의 눈과 닮아 있었다. 생존의 의미보다 생존의 본능만 남은 색이 바랜 눈은 대체로 초점이 없거나 희미했고, 무표정한 얼굴로 죽은 듯 살아 있었다. 아토피와 이차감염, 온갖 수술로 힘겨워하던 시절, 나는 거리와 삶의 이면 모습들을 보며 왜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물었다. 마치 나의 고통이 나를 뒤덮을 때 했던 질문과 같은 질문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블로그와 웹사이트의 기록은 모두 그 질문에 대한 나만의 의미와 답을 찾는 과정을 담고 있따.

나는 상상할 수 없는 병을 얻었으므로 철저하게 현실을 포착했고 사진으로 남기며 동시에 글로 승화시켰다. 언젠가부터 나의 눈은 골목과 거리와 인간관계와 사람의 생활 터전인 환경을 비춘다. 세상이 골목이 아닌 대로를 비추는 동안 또 시골이 아닌 도시를, 지방이 아닌 서울을, 노인이 아닌 청년을 비추는 동안 나는 뭍 시선이 닿지 않은 곳에 시선을 옮겨놓는다. 끊임없이 미디어가 비추는 주류의 세상 이면에는 차마 그림자조차 닿지 않는 시대의 그늘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서 삶의 이유와 의미를 매일 발견한다. 그게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이유이다.